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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북도

경주 보문들-낭산 둘레길 18년 01월23일 산행

by 산이조치요 2018. 1. 23.

분황사-모전석탑지-낭산(113.1m)-황복사지삼층석탑-진평왕릉-보문선원-

설총묘-연화문 당간지주-보문사지석조-당간지주-석당산 (75.5m)-

신문왕릉-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낭산(99.5m)-능지탑지-중생사-

경주낭산 마애삼존좌상-내리마을버스정류장 (13.78km 천천히5시간)

홀로 대중교통




 


동대구역 SRT 08시12분 출발 -신경주역 08시29분도착 (17분소요)

요금 7.500원


신경주역을 빠져나오면 시외버스 타는곳이 있습니다


700번 좌석버스를 타고 분황사로 갑니다 (약 32분소요)

요금 1.700원


분황사 도착



분황사 버스 정류장 하차

버스에서내려 진행방향으로 직진


삼거리 에서 오른쪽으로 곧장가면


구황교 사거리 에서 또 오른쪽방면으로

약7-80m 쯤 가다가


횡단보도를 만나 건너간다


횡단보도 건너서 직진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구황사 모전석탑지가 보인다


구황동 모전석탑지 가까이서 가보고


구황동 모전석탑지

분황사에서 동남향으로 약 300M 떨어진 산업도로 변에 위치하여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경문왕 설화의 배경이 되는 도림사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모전석탑지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다른 지역 (영양지방)의 8세기

모전석탑과의 시차 (약 100년)안에 존재하였던 실례이다.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이 안산암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인왕상의 양식기교가

 분황사 모전석탑의 인왕상과 유사하고 예술적 가치에 있어서

 분황사 모전석탑에 못지 않아  분황사 모전석탑을 모방한 비슷한

 제작년대 (660년경)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남북 감실의 2쌍의

인왕상이 남아있고 1쌍은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이 동, 서, 남, 북 4방향의 1쌍식 전체 4쌍의

 인왕상이 있었던걸로 보인다)


구황동 모전석탑지를 둘러보고

다시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갈림길에서 왼편 황복사지 삼층석탑 방향으로


약50m 정도 진행하다가 낭산 (113.1m) 을 오르기 위해서 오른편으로 밭을지나

산길로 들어간다 (길도 제대로없다)


개척해서 조금 올라가면 좋은길을 만나고


묘지가 있는 낭산 (113.1m) 정상에 도착한다


낭산 (113.1m) 정상 삼각점


낭산정상 코팅지


서울 개척산악회 조삼국님 표시기 옆에 산이조치요

표시기를 하나 걸어두고


산길이 뚜렸한 능선길로 진행한다


대나무숲 옆을 지나고


청주 한씨 묘지를 지나면


임도를 만나 왼쪽방향으로 황복사지 삼층석탑방향으로 간다


사거리 갈림길에서 또 왼편으로


황복사지 삼층석탑 도착


황복사지 삼층석탑


황복사지 석탑 (국보제 37호)


직진방향으로 잠시 걸어나가면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포장길 따라서 곧장 앞으로


오른쪽 밭에는 문화재 발굴이 한창이고


계속 포장길을 따라 걸어 갑니다


진평왕릉 입구 도착


진평왕릉 모습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주차장을 지나면


도로 건너편으로 보문선원을 찾아간다


보문선원 입구


보문선원 경내를 잠시 둘러보고 나와서


도로를 나온후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다보면 왼편에 설총묘를 찾아간다


마을길 안으로 들어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이정표가 없다)


전 홍유후 설총묘

보문마을 안쪽의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묘는 예로부터 설총의 묘라고 전해온다.

원효와 요석공주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신라10현의 한사람으로

신라의 대학자였다. 한자에 토를 달아 만든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인물이며 왕실소속의 학자로서 왕의 자문 역할을 담당하였고

저술로는 화왕계가 있다.


설총묘앞에 상석이 있다


설총묘를 둘러보고 다시 도로를 나온후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가면


오른편으로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찾아간다


포장길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른편 연화문 당간지주를 구경하고

되돌아 나와서 왼편 보문사지 석조와 당간지주를 만나로 간다


연화문 당간지주


연화문 당간지주

높이 1.46m. 현재 당간지주 아랫부분의 대부분이 매몰되어 있어서,

간대(竿臺)나 받침 부분의 유무(有無), 가장 아랫부분의 구조 등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는 동서로 62㎝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가운데부분이 튀어나온 모양을 하고 있다. 꼭대기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너비 13㎝의 큼직한 간구(竿溝)를

 두었다. 특히 윗부분 바깥쪽면의 네모난 구획 안에는 지름 47㎝ 크기의

 여덟 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처럼 당간지주에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한 사례는 이 당간지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제작 시기는 대체로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특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 다만, 이 당간지주가 동남쪽에 터가 남아 있는 보문사(普門寺)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절에 속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보문사지 석조를 찾아 갑니다


보문사지 석조


보문사지 석조

보문사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사찰내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곳이다. 보문사는 확실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전시 탄방동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서원의『연혁지』에 이 절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서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법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터에는 건물자리 5개와 석조·

괘불지주·맷돌·세탁대 등이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조는 전체가 4각을 이루고 밑바닥과 각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졌다

. 바닥아래와 윗부분에는 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빼기 위한 구멍이 있는데,

 특히 윗부분의 구멍이 주전자 꼭지모양으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 내렸을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석조와 오른편으로 약100m 정도 떨어져있다


보문사지 당간지주


보문사지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통  절 입구에 당간지주를 세워두었는데 악귀를 쫓는 의미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당간지주는 서로 상대하여 서있으며 한쪽은 상륜부가 절단되어있으나
상하가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곳 보문사지는 주변에서 보문이라는 기와를 발견하여 이곳이
신라시대 보문사라는 절터가 있었다는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제다시 논두렁길을 따라 도로로 나가야 합니다


보문리사지 입구 이정표


도로 따라 가다가


삼거리 갈림길 에서 오른쪽 석당산 방향으로


그림과 같이 석당산 (75.5m) 은 낮고 조그만한 산입니다


선답자님들의 표시기


석당산을 되돌아 나온후 논두렁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장제마을 회관 앞을 지나서


기차철로 를 지난후


도로를 나온후  오른쪽 방향으로


효공왕릉 입구를지나서


능마을 버스정류장을 통과


굳게문이 잠겨있는 신문왕릉 홍례문 앞에 도착




다시 선덕여왕릉 을 찾아 갑니다


오른편으로


선덕여왕릉 가기전에 사천왕사지를 둘러보고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삼국유사』문호왕 법민조(文虎王 法敏條)에 기록된 건립

설화를 보면,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경주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년(문무왕 15)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가사(假寺)를 사천왕사로 고쳐짓고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선덕여왕릉 주차장을 지나서 약600m 정도 걸어 갑니다


동해선 남부 철도 아래를 지나서


이정표 따라서


소나무 숲길 따라 올라가면


선덕여왕릉 에 도착 합니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선덕여왕릉 위에 낭산 (99.5m) 정상


선덕여왕릉 을 되돌아 나온후 능지탑지를 찾아 갑니다


능지탑지


능지탑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 34호

현재의 능지탑의 외관은 1979년에 보수할 때 임시로 정사각형 평면의 2층

 석조 축단()으로 복원되었다. 기단부는 한 변의 길이가 12m, 높이가

 1m인 석단으로, 상부의 낙수면은 토층으로 덮고 잔디를 심는 방식으로

마감되었으며, 둘레의 중대석에는 12지상 9구를 방위에 맞추어 같은

간격으로 기둥처럼 배치하였다. 12지상 가운데 뱀(남면)·범(동면)·용(동면) 등

 3구는 없어졌다. 현존 12지상 중 일부는 낭산 동쪽 황복사() 앞에 있던

 유구로서, 목탑터로 알려져 오다가 최근에 왕릉터로 수정된 유적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갑석은 연꽃을 새긴 장대석과 정사각형 대석

두 가지인데 후자는 귓돌로 사용되었다. 1층탑신부는 옥신의 한 변이 6m이고

 기단부처럼 연화석을 얹었는데, 다만 상부에 굄돌 1단을 더 쌓고 토단을

 경사지게 쌓아올려 사모지붕처럼 마감하고 중심부에 자연석을 마치

 보주()처럼 사용하였다. 한편 연화석은 양식적으로 8∼9세기에나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여, 석단형 유구가 후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고 있다. 능지탑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려왔는데, 무너진 채 1층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신라삼산조사단(調)이 1969년 이래 1971년까지 4차에

 걸쳐 조사한 끝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의

화장터 유적으로 비정하였다.


중생사 방향으로


포장길을 따라서 약 100m 정도 걸어가면


중생사를 만난다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17-1번지에 소재하며 낭산(狼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의 일부 게재글에는 불국사의 말사로 잘못 설명되어 있으나 

 현재 조계종 등록 사찰이 아니다. 중생사는 신라 문무왕19년(679)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지장전에 모셔진 삼존불이 보물 제665로 지정된

『낭산 마애삼존불』인데 풍화작용 등으로

  삼존불의 형태가 완전하지 못하다.


중생사 오층석탑


중생사 지장전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

경주 낭산 서쪽 기슭의 바위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한 상태이다. 가운데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본존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불이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양감있는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살짝 미소를 띤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지장 보살의 모습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양 협시는 본존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몸에 갑옷을 입고 있다. 왼쪽 협시는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협시는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陵只塔)이 이곳과 가까이 있는 점과

조각수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생사를 빠져나와서 내리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행마무리

 10번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약15분소요)


경주시외버스 터미널

경주-대구서부 정류장 (5.900원)

1시간 20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