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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북도

성주 선석사-세종대왕자태실-왜관/매원마을 24년 09월 03일(오후)

by 산이조치요 2024. 9. 3.

다녀온날: 24년 09월 03일 (화) 오후 

탐방순서:선석사-세종대왕자태실-칠곡왜관 매원마을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92년(효소왕 1)에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숙종 10)에 혜묵(惠默)·

나헌(懶軒) 등이 중창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순조 4)에

서윤(瑞允)이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대웅전·명부전·칠성각·산왕각·어필각(御筆閣)·

정법료(正法寮)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 어필을 보관했던 곳이 어필각이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칠성각·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이 절의 어필각 주위에는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쌍곡죽(雙谷竹)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는 그 소리의 맑고 깨끗하기가 다른 피리와

비길 바가 아니었으며, 이를 교방적(敎坊笛)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쌍곡죽이 남아 있지 않다.

성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세종대왕자 태실비

 

197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각 태실은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간석(竿石)·옥개(屋蓋)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이곳에 봉안된 19기의 태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문종(文宗, 推定)·세조(世祖)·안평대군(安平大君)·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 추정 1977년 보수시 지석 출토)

평원대군(平原大君)·영응대군(永膺大君)·원손(元孫, 1441, 端宗으로 추정,

1977년 보수시 지석 및 분청상감연화문개 출토)·화의군(和義君, 추정)·

계양군(桂陽君)·의창군(義昌君 추정, 1977년 보수시

분청상감연화문개, 분청사기대접, 토기태항, 지석 출토)·

한남군(漢南君)·밀성군(密城君)·수춘군(壽春君)·

익현군(翼峴君)·장(璋)·거(乫)·당(瑭) 등이다

 

 

1977년 태실복원 정화사업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세종의 원손인 단종의 태실도 일단 여기에 마련하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으로 알려졌다.

정화사업시 석실내에서 토기태항(土器胎缸),분청사기대접

(粉靑沙器大接),분청상감연화문개(粉靑象嵌蓮)등이

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 도자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칠곡(왜관) 매원마을 

 

칠곡 매원마을

칠곡 매원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영남 3대 양반촌으로 알려져 있다.

번성기에는 400여 채의 가옥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대부분 손실되어 현재는 고택 60여 채만 남아 있다.

자연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아름다운

우리 전통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