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개마을 -좌측으로-응와종택-감응사-영취산 정상 -갈림길-성주첨경재-
한개마을 주차장 (2시30분)
영취산은 332m로 높이는 낮지만 울창한 수림이 길 양쪽으로 뻗어있는 등
주변경관이 수려해 경치를 비교해도 어느 명산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영취산 아래 성산이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70여채의
전통 고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개마을과 함께
숲속에 반쯤 파묻힌 채 영취산 거의 정상지점에 천년역사를 고이
간직하고있는 감응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가볍게 산행도 하면서 성주의 관광명소도 함께
둘러볼 수 있어 각광받고 있다.
600년 역사가 깃든 한개마을 한개(민속)마을은 성산이씨 집성촌으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촌이며, 전국6번째로 지정된 전통민속마을이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와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정착하여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 이씨가 집성하여 살고 있는 전통 깊은 마을이다.'
한개'라는 이름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개울이라는 의미의 '개'가
합쳐진 말로, 예전에는 마을 앞에 나루터가 있어서 '대포(大浦)'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에 들어서자 관광 안내소도 있고요
그 곳을 지키는 문화 해설가님도 계시구요
주차장도 있습니다
마을입구 삼거리 에서
먼저 왼쪽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마을 바닥에 깔려있는 한개마을 민속마을 표시
마을 안쪽으로 쭈욱 들어가면
응와종택을 만나고
뒤편으로 돌담길 따라 걸어가면
마을 중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고
포장길 따라 잠시걸어가면
산길 입구에 돼지 장군상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영취산 산행에 시작된다
시멘트 포장길을 가파르게 올라서면
대나무 숲을 지나고
감응사 입구에 도착한다
돌계단길 올라가면
감응사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되었다. 당시 태자가 눈병이 걸렸는데,
왕비가 태자를 데리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곳에 왔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독수리가 문 앞 나무 위에 나타났다
. 이상하게 여겨 독수리를 따라가다가 지금 감응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약수를 발견하고, 그 물로 씻고 물을 마시니 눈병이 나았다. 애장왕은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여기고 절을 세워 각은사라고 하였다. 나중에 감응사라고 고쳤다.
감응사 대웅전 뒤편으로 거북바위가 보이는데
안개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
이 약수는 절 뒤의 절벽 사이에서 나오는 물로 샘터를 '옥류정'이라 하며
지금도 그 물맛이 달고 차가와 약수로 이름이 나 있다.
산 이름을 신령스러운 독수리란 뜻으로 '영취산'이라 명했다.
범종각 옆으로난 길을 따라 가면 영취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열린다
감응사 주지스님 의 승용차가 서있는
뒤편 능선으로 영취산 오름길이다
영취산 등로입구에 바위가 듬성듬성
10여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넓은 헬기장의 영취산 (332m) 정상
영취산 (332m) 정상 헬기장
이곳에 김문암친구가 달아놓은 영취산 정상목이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 떼어 버린것 같다
그대신 반가운 연리지부부 하늘본부님의 표시기가 반긴다
정상 헬기장에서 하산길은 오른쪽 방향
잠시뒤에 만나는 봉우리 에서
또다시 감응사방향인 오른쪽으로
화마의 흔적이 있는 가파른 내림막길이
한참 이어지고
버려진 안테나 안부를 지나
조금더 편안한 숲길을 이어가면
그림과 같이 나무가 서있는 희미한 삼거리 갈림길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X 모양의 나무가 쓰러져 있는
희미한 산길을 조금만 내려서면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보이기시작하고
파란지붕이 보이는 임도길에 내려선다
잠시뒤에 한개마을 마을입구에 내려서면
성주 첨경재 가 눈앞에 보인다
2시간여의 영취산 산행을 마치고
지금부터 천천히 한개마을 을 둘러보기로 한다
한개마을은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3대 전통마을로 꼽힌다.
한창 번창했을 때 이 마을 가구가 100호가 넘었으나 현재는 약 70여 호
정도로 줄었고, 이 중 약 20호는 빈집이다.
사람이 사는 50여 호 중에서 성산이씨가 90%일 정도로 이 마을은
성산이씨의 씨족마을이다. 이처럼 씨족마을의 전통을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문화재도 많다.
하회댁
전통적으로 집에는 ‘택호’라는 이름을 붙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택호는
안주인의 출신 마을이나 그 마을이 속한 면의 이름을 딴다.
그러므로 택호는 안주인의 호칭도 된다. 그러나 집안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있으면
마을 이름 대신 벼슬 이름을 택호로 삼는다. 장관댁, 장군댁,
교장댁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이런 예다.
그런데 한개마을의 택호는 매우 특이하다. 수십 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지만
벼슬 이름을 택호로 삼은 건 교리댁뿐이다.
‘북비고택’이라 불리는 집에서 태어난 응와 이원조는 19세기 중엽
한성부윤(서울시장)과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을 판서댁이라고 부르지 않고 응와의 증조부
이석문의 호를 따서 북비고택이라 부른다.
다른 집도 주인의 호를 따서 ‘한주종택’이나 ‘극와고택’ 등으로 부르고 안주인의
출신지를 따서 ‘하회댁’이나 ‘월곡댁’이라고 말한다.
주인의 호를 택호로 정한 집이 한개마을처럼 많은 곳은 거의 없다.
여기서 한개마을 사람이 벼슬보다 이름 즉 ‘명예’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도동댁
한개마을은 지금 보수공사가 한창중이다
한개마을 돌담길
사진으로본 한개마을 전경
아침나절에는 짙은 안개로 보이지 않던
영취산 정상능선이 뚜렸하게 보인다
산이 조치요 카페에 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
밑에 그림을 클릭 하시면 바로이동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