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정문-삼천지-상수도 관리소-산불감시초소-경주인왕동고분군 복원지
-화산서당-박물관 (8.2km 3시20분) -도보 20분 남매지로 이동
영남 대학교 산책길 개념도
오늘도 역시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멀리 산행은 못가고
우산하나 챙겨 대구지하철 2호선 종점인 영남대 3번출구로 나선다
영남대 정문을 통과
오른쪽 인도길을 따라서 약 5분정도 걸어가면
천마아트 센터 건물 을 만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꺽어면
천마아트 센터 앞을 통과
도로 건너편으로 산책길이 이어진다
화살표 방향으로
삼천지 둑으로 올라선다
삼천지 둑길을 따라서
삼천지 못에는 지금 한창 연꽃이 만개해 있습니다
삼천지 둑길을 지나서 잠시 임도길을 따르면
도로를 만나
도로를 걸어 갑니다
산학 협력단 방향으로
도로따라 쭈욱~~~
오른쪽 화살표 방향으로
04번 이정표 따라
소류지 앞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삼거리 갈림길에서 나무 계단길로 올라 선다
체육공원에 올라선후에
오른쪽 화살표 방향으로
갈림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노란색 03번 방향으로
상수원 관리소 앞에서 왼쪽 방향으로
갈림길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노란색 05번에서 6.7.8.9.10.11.번을 다녀와서
왼쪽 12번 방향으로 진행 해야 합니다
06번 노란색 삼거리 갈림길에서
산길로 올라 간다
걷기좋은 소나무 숲길
산불 감시 초소 갈림길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계속 화살표 방향으로
체육시설이 있는 봉우리
나무 의자 쉼터 한곳을 지나서
화살표 방향으로
계속 번호따라 진행 하면 된다
인왕동 고분군 복원지 앞
일휴당 담벼락을 따라서
삼각점 봉우리를 찾아 나선다
삼각점이 놓여있는 체육시설
삼각점
일휴당
일휴당은 원래 안동 예안 오천동에 있었던 건물로 1974년 봄에 현 위치로 옮겨왔다.
주인인 금응협(琴應夾)은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오천 7군자 중의 한 분으로
중종 21년(1526년)에 태어나서 선조 29년(1596년)에 돌아가신분이다.
금응협은 고려 명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금의(琴儀)의 후손으로
쌍송정의 주인인 금혜에게는 현손이 된다.
봉화 금씨는 대대로 학덕을 높이 쌓은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조에는 영남의 문벌가였다.
일휴당은 그 주인인 금응협에 의해 선조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전해내려 오는 당기(堂記) 또는 창립관계 문서가 없어 확실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일휴당(日休堂)" 현판은 건축할 당시의 것으로 퇴계이황이
제자인 금응협에게 써 준 것이라 한다.
이후 일휴당은 금씨 문중에서 관리되어 오다가 정조 11년(서기 1787년)에개축되었다.
일휴당은 이때 개축된 것이다.
경주 맛배집
경주맞배집은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내에 형성된 취락지의 건물 중 하나로
1977년 5월에 현 위치로 이건해 왔다.
이 건물은 좌측으로부터, 퇴를 합한 넓은 부엌 1칸과 툇마루를 낸 안방, 대청
, 건너방(사랑방)이 각 1칸 순으로 배열된 一字형 집이다.
그리고 부엌은 앞문과 뒷문이 판문으로 되어 있어 전후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경주 맞배집의 아름다움은 소박함과 간결한 맛에서 나온다.
홑처마에 처마의 끝만 가볍게 반전시킨 지붕이나 간결한 띠살문 형태의 방문이나
자연적인 굴곡을 그대로 살린 여러 가구의 모양새에서 맞배집의 아름다움이 표출된다.
화산서당(花山書堂)
장경우 張慶遇(1581~1656)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효종 2년(1651)에 세운 건물이다.
장경우는 조선 중기 학자로 정묘호란 때 인동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여헌문집> <만회당집>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본관은 인동 仁同이며 자는 만회당 晩悔堂이다.
이 서당은 원레 석적읍 성곡리에 있었으나,
사림의 여러 의견에 따라 헌종 6년(1840)에 석적읍 중리에 옮겨 세웠다.
이 때 선현의 위폐를 모시는 건물로 새로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 훼철되어 지금은 강당과 양예청만 남아 있다.
후에 문화재 관리를 위하여 2009년 영남대학교 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의인정사
이 건물은 원래 안동군 예안면 의인마을에 있던 것으로,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놓인 것을 1976년 11월에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의인정사라는 건물의 이름은 원래 이 건물이 위치해 있었던 의인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의 주인이었던 이동엽씨는 순도의 주손이다. 의인 마을의 서편 하류 쪽에,
이들의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인들과 하인들이 모여 살았던 섬마을이 있었던 것을
볼 때 의인 마을의 경제력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건축배치는 대지 420평에 안채, 좌우 옆채, 사랑채 39칸 60평으로 되어있다.
또 본채 서북쪽으로는 정문인 소슬대문과 행랑채 5칸 11평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동북쪽에는 방앗간, 헛간, 칙간 등의 3칸 7평의 건물이 배치되고
또 본채 좌측편에 칙간 1칸이 섰고 우측편에는 작은 문 1칸이 서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전 47칸 연건평 80평의 대주택이다.
신라시대 우물
까치구멍집
까치구멍집은 1975년 6월에 안동군 월곡면 도목동에서 민속원으로 이건 복원되었다.
까치구멍집이라는 명칭은 가옥구조의 특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까치구멍집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자연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적응해 왔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까치구멍집이 주로 위치하는 경북 산간지역은
자연이 가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위험에 지극히 노출된 곳이다.
까치구멍집의 공간배치의 특이성은 가능한대로 가옥을 구성하는 모든 공간을
가옥내부의 주거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데서 비롯된다.
가옥구조를 이렇게 폐쇄적 공간으로 구성한 이유는 추위를 피하고
외부로부터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가옥구조가 이 정도로 밀폐되어 버리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환기의 문제이다.
까치구멍집에서는 매우 과학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공기의 환류작용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그것 중의 하나이다.
부엌과 외양간에서 나오는 더운 공기를 빼내기 위해서 지붕 용마루 양옆에
환기창을 뚫어 놓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까치집과 흡사하게 생겼다.
까치구멍집이라는 이름도 이 환기창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입문과 대청의 문을 마주보게 위치시킨 것도 환기와 관련이 되어 있다.
구계서원(龜溪書院)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에 위치해 있던 서원으로, 이 지역이 수몰되면서
1974년 10월에 영남대학교 민속원 내의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구계서원은 원래 강당 건물 뿐만 아니라 사당건물인 모현사와 일신재, 시습재와
같은 동재·서재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그후 1896년에 유림의 공론에 의해 강당만 건립되었다.
따라서 강당 건물인 독역재만 이건 대상이 되었다.
구계서원의 향사인물은 고려 말 유학자인 역동 우탁선생(1263∼1342)인데,
역동선생은 원(元)으로부터 정주학에 관한 서적을 들여와 독학으로 이를 체계화시켰다.
역동선생이 역학지선으로 숭앙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구계서원의 강당인 독역재는 석축대 위에 부정형 덤벙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건축하였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평 20평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을 덮었다.
이 건물은 중앙 대청 좌우익 협실로 구성되며 중앙대청은 정자 마루다.
좌우익 협실은 각 2칸으로 되어 있는데 좌우 양쪽의 구조가 같다. 동서재와 묘우,
그리고 진덕문은 2000년 12월에 중건된 것이다.
민속촌 입구를 빠져 나와서
빨간색 08번 화살표 방향으로
CI대학본부 앞을 지나서
계속 화살표 방향으로
천마 씨름장
박물관
박물관을 빠져 나와서 트레킹 종료
영남대 입구로 나와서 남매지 못을 찾아 갑니다
도보이동 약 20분정도
남매지 입구
나무테크 방향은 올8월까지 공사중이라
왼쪽연꽃 식물원 방향으로 (시계방향)
으로 한바퀴 돕니다
하루종일 비가 오는 가운데 여유있고 보람있는 트레킹 이었습니다
가을 단풍 시즌에 한번더 찾고 싶은 곳입니다
산이 조치요 카페에 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
밑에 그림을 클릭 하시면 바로이동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