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티교.ㅡ589봉.ㅡ천반산.ㅡ말바위.ㅡ성터.ㅡ송판서굴.ㅡ뜀바위.ㅡ죽도 .ㅡ
장전마을 (4ㅡ5시간)
오늘은 산악회 정기산행날이다
52명의 많은사람들을 태우고 천반산 입구인
섬티교 앞에 도착한다
섬티교 앞에 세워진 등산로 안내판 뒤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오르막이 없는 걷기 좋은 능선길을 15분정도 걸어가면
섬계마을 에서 올라오는 갈림길 이정표를 만나고
천반산 깃대봉 방향으로 진행
5분여 뒤에 두번째 만나는 갈림길에서
산악회 회원들은 천반산 정상으로 바로 오르는 길로 안내해드리고
일행3사람은 능선길을 따라 천반산 정상으로 오르기로 한다
한참올라가면 능선길에 철탑을 지나고
한봉우리 에 올라서면 아무런 표식이 없는 589봉에 도착
천반산 정상으로의 산길은 오른편으로 꺽여진다
한참 내리막을 내려서면
가막교 에서 먹개골을 따라서 올라오는 안부에 내려서고
천반산 정상 까지는 0.7 km 를 더 올라가야 한다
밧줄이 설치된 바위길 오르막을 올라서면
좁은 공터의 천반산 깃대봉 정상 도착
섬티교 에서 1시간 10분소요
천반산 정상 깃대봉에 세워진 이정표에서
천반산 성터 1.2 km 방향으로진행을 서두른다
걷기좋은 소나무 숲길을 5분여 걸어가면
이상하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 가 서있는 전망대 도착
예전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마이산의 두바위가 잘보였는데
오늘은 흐린날씨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전망대에서 잠시내려오면 말바위를 지나고
앞에보이는 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해서 올라서면
정여립이 군사훈련을 했다는 천반산 성터에 도착
생각보다는 아직까지 잘 보전되어 있는것 같다
천반산 성터 도착
이곳넓은 공터에서 산악회원 모두가 점심시간과 휴식을 취하고
죽도 1.5 km 방향으로 하산길을 서두른다
약5분뒤에 송판서굴 갈림길 삼거리 에서
송판서굴을 왕복 0.6 km 다녀온다
송판서 굴로 가는 등산길은 100 m 정도는 평길이지만
200 m 정도는 얼마나 경사가 가파르고 미끄러운지
밧줄이 설치 되어 있지만. 많은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렵사리 송판서 굴도착
다시 내려왔던 만큼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간다
송판서굴 갈림길 삼거리 로 되돌아와서
죽도 방향으로 진행
뜀바위 를 만나고
뜀바위 에서 내려다보는 구량천과 장전마을 모습
뜀바위 에서 내려다본 구량천모습
뜀바위 에서 약 20 m 정도 내려오다
죽도로 하산길은 봉우리에 올라서서 오른편으로 우회해서
진행 해야하는데 선두사람들이 밧줄이 설치된
경사가 심한 내리막을 내려서는 바람에.
죽도유원지로 내려서는 임도까지 경사도 심하고 길이 제대로 없어
무척고생끝에 임도에 도착한다 (주의 구간)
죽도로 내려서기전 밭을 지나서
구량천이 마주치는 죽도임도길에 내려서고
오른쪽방향으로 임도길을 걸어가면
임도길을 따라서..
신발을 벗어들고 구량천을 건너서
구량천을 건너는 나그네님
구량천을 건너서 한참 임도길을 걸어서 내려오면
죽도 병풍바위앞에 도착하고
병풍바위 앞에 세워진 이정표
뜀바위에서 제대로 하산을 하면 이리로 내려온다
임도길을 걸어오다 장전마을 냇가에서
흘린땀을 씻고
장전마을 안으로 시멘트 길을 잠시올라서면
49 도로에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장전마을 입구.
전북 진안 천반산(天盤山 646.7m)은
전북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와 동향면 성산리,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주능선 일원이 하늘을 담는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조선 중기의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본관 東萊, 자 仁伯, 호 竹島)의
꿈과 원혼이 서린 곳이다.
선조 22년(1589년)에 일어났던 기축옥사, 금년(2009)이 기축년이니
420년전 기축년의 일이다.
정여립(1546~1589)은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나 선조3년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라는 벼슬에 올랐던 인물
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편에 서면서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 밖에 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며 활동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한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역모사건으로 휘말리고 1000여명이 숙청되고 피바람을 불러온
기축옥사로 이어진다.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차별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정여립은 당시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혁신적 사상가였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의 통론이 아니었다"는 주장 등은
당시 집권세력이나 정쟁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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